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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의 역사 서원은 향교와 더불어 유교이념에 입각한 지방교육을 담당해 왔던 교육기관이다. 향교가 국립 교육기관이었던 데에 비해 서원은 사학(私學)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해 왔으며, 특히 조선 중기 이후 교육기관으로뿐 아니라 유교적 학술연구의 구심점으로서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여 왔다.우리 나라에 있어 사설교육기관의 역사는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 문종(文宗) 7년(1053년)에 당시의 유교학자 최충(崔冲)이 관직에서 은퇴한 후 서당을 세워 제자들을 가르쳤는데, 점차 그 제자들이 늘어남에 따라 이를 9개의 반으로 나누어 가르쳤기 때문에 최충이 설립한 사학에는 '9재(九齋)'라는 명칭이 붙여지게 되었다. 이 9재에서는 많은 문과급제자가 배출되었으며, 이 문하에서 공부한 사람들은 스승인 최충의 호를 따서 '문헌공도(文憲公徒)'라고 불렸다. 고려 말엽에는 이 9재 이외에도 사립 교육기관이 11개가 더 생겼으며, 이들을 모두 합하여 '12공도(十二公徒)'라고 불렀다. 그러나 고려 말 성리학의 전래와 이를 바탕으로 조선왕조의 창업이 이어지면서 사학은 더 이상의 발전을 보지 못하였다. 그 주된 이유는 국립 교육기관을 중심으로 한 조선왕조의 교육진흥정책에 있었다. 조선왕조는 창업과 동시에 성리학의 이념에 입각하여 유교 부흥을 위한 교육체제를 전면적으로 정비하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이에 따라 개경에 자리잡고 있던 성균관이 서울로 옮겨져 국립 최고학부로서의 명실상부한 권위와 체제를 갖추게 되었으며, 이후에도 조선 초기 역대 임금들의 강력한 지방교육 진흥책에 힘입어 행정단위별로 전국에 걸쳐 300여개의 향교가 설치되는 등 관학 중심의 교육 체제를 완비하기에 이르렀다. 이같은 관학중심체제 하에서의 유교교육의 진흥은 15세기 중반까지는 비교적 안정된 형태로 지속되어 갔다. 그러나 15세기 후반에 이르러 관학은 점차 쇠미의 징조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관학이 부진하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우선적으로 들 수 있는 것은 성균관과 향교가 유교교육의 본질에서 벗어나 출세를 위한 도구로 변질되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유교교육과 학문연구의 주축을 담당해야 할 관학이 단지 개인의 출세를 위한 과거시험을 준비하는 곳으로 바뀌게 되었으며, 이들의 교육을 맡고 있는 교관들의 질적 저하 현상도 심각한 양상으 나타났다. 이러한 관학의 부진현상에 더욱 박차를 가한 것으로 세조(世祖)의 집정을 들지 않을 수 없다. 단종(端宗)을 폐위(廢位)하고 왕위에 오른 세조는 자신의 즉위를 반대하였다는 이유로 집현전(集賢殿)을 폐지하고 불교를 궁궐 깊숙이 끌어들였다. 이로 말미암아 대의명분(大義名分)을 중시하는 유교의 많은 학자들이 관계에서 물러나 초야(草野)에 묻히고자 하였으며, 무예(武藝)를 중시한 세조의 정책에 따라 학교에 대한 관심도 점차 퇴색해 갔다. 관학의 부진현상은 16세기에 이르러 극한적 상황에까지 도달하였다.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연산군(燕山君)은 특히 유교를 마땅치 않게 여기고 있었다. 이는 유생(儒生)들이 한결같이 경서를 인용하여 자신의 실정(失政)을 비판하였기 때문이다. 연산군의 횡포는 날이 갈수록 그 정도를 더하여, 경서를 불사르고 성균관을 연회장으로 만들었으며 학자들의 독서조차 금지하기도 하였다. 더욱이 이 시기를 전후하여 무려 네 차례에 걸쳐 꼬리를 물고 발생하였던 사화(士禍)로 많은 수의 유교학자들이 탄압을 받아 죽거나 유배를 떠나게 되었으며, 직접적인 피해를 당하지 않은 학자라 할지라도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가 버리고 말았다. 이에 따라 관학의 침체는 극에 달하게 되었다. 하지만 관학의 침체가 곧 유교교육 전체의 침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중앙의 혼란을 피하여 낙향한 많은 유교학자들이 벼슬길에 발을 끊고 학문연구에 몰두하는 한편, 주변의 청소년들을 모아 가르치는 등 지방에서는 새로운 형태의 유교교육이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같은 움직임은 16세기 후반부터 본격화된 서원의 설립으로 이어졌으며, 바야흐로 유교교육은 관학중심체제에서 사학중심체제로 그 흐름이 변모하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 나라에 최초의 서원이 설립된 것은 조선조 중종(中宗) 37년(1542년)의 일이다. 당시 풍기 군수를 지내던 주세붕(周世鵬)은 우리 나라에 최초로 성리학을 들여온 안유(安裕)를 추모하고 그 덕을 기리기 위하여 그의 옛 집터 위에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내며 인근의 청소년들에게 유교를 교육하기 시작하였다. 이곳이 바로 우리 나라 서원의 효시라 할 수 있는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다. 물론 그 이전에도 서원이라는 명칭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전 단계에서의 서원은 교육기관과 함께 선현에게 제사를 지내는 교화 기능을 동시에 갖추고 있지 못하였으므로 명실상부한 서원으로는 볼 수 없다. 소수서원의 설경 백운동서원의 설립을 기점으로 하여 전국 요소에 서원이 설립되기 시작하였으며, 특히 16세기 후반에서부터 18세기 전반에 이르기까지의 약 200년 남짓한 기간 동안에 전국 각지에 무려 400여 개의 서원이 설립되어 사학교육의 전성시대를 구가하였다. 이 가운데 국가의 재정지원을 받았던 사액서원만도 전체 숫자의 절반이 넘는 198개여서 조선조 후반기의 지방교육체제가 명실공히 서원 중심의 사학체제로 진행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도산서원 전교당 관학인 향교의 침체로 인하여 발생한 유교교육의 공백을 충실히 메꿔나가며 지방교육의 주축을 형성해 왔던 서원 역시 시간이 흐름에 따라 여러 가지의 폐단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중앙정계에서 붕당정치가 진행되었던 것과 궤를 같이한다. 훈구파의 몰락 이후 중앙정계에 진출한 사림파는 정치적 견해의 차이로 점차 파벌이 형성되기 시작하였으며, 서원 역시 이들 세력의 근거지로서 그 성격이 변모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세력확장 및 과시를 위하여 각자의 근거지가 되는 향촌에 불법적으로 사사로이 서원이 건립되는 경향이 나타났으며, 조선조 후기에 이르면 이같이 중앙에 알려지지 않은 채 남설된 서원의 수가 600여 개를 넘어서게 되었다. 한 고을에 10여 개가 넘는 서원이 설립되는가 하면, 동일 인물이 10여 개의 서원에 동시에 배향되는 사례까지도 발생하였다. 이같은 서원의 남설은 궁극적으로는 교육기관으로서의 서원의 격을 크게 떨어뜨리는 원인이 되었을 뿐 아니라 인근의 백성들에게까지 많은 피해를 주게 되었다. 따라서 정부에서도 이같은 폐단을 시정하기 위하여 수 차례 노력을 하였으나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한 채 서원의 폐해는 더욱 심화되었다. 그러던 중 대원군(大院君)이 정권을 잡게 되면서 전국에 있는 서원의 철폐를 명령하였다. 대원군의 이같은 강력한 정책에 따라 대부분의 서원이 문을 닫게 되었으며, 결국 순수한 서원은 27개소만이 남게 되었다. 그 뒤 오래지 않아 우리 나라의 학제가 근대적으로 변화하면서 성균관 및 향교와 더불어 서원 역시 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이 상실된 채 봉사(奉祀)기능만을 유지하게 되었다. 비록 조선 후기에 나타난 여러 가지의 폐단으로 인하여 국가에 의해 철폐되는 운명을 겪기는 하였지만 우리 나라 유교의 학문적 성과가 거의 대부분 서원을 통하여 이룩하였다는 점, 그리고 향교의 침체로 인한 지방교육의 부재를 충실히 보완하였던 점 등은 사립 교육기관으로서의 서원이 우리 유교의 부흥을 위해 크게 기여한 부분들이라 할 수 있다. 서원의 기능 서원의 주요기능은 기본적으로는 향교와 동일하게 교육기능과 교화기능이 있었다. 먼저 교육기능에 대해서 살펴보면, 서원에 있어서의 교육의 목표는 성현을 본받고 관리를 양성하는데 있었다. 이를 위해 유생들은 다른 교육기관과 마찬가지로 소학에서부터 시작하여 사서와 오경을 중심으로 공부하였다.정치적 탄압으로 중앙정계에서 물러난 학자들에 의해 대부분의 서원이 설립되었던 까닭에 '성현을 본받는다'는 교육목표는 초기의 서원교육에서 특히 중요시되었다. 그들에게 있어 학문의 진정한 의미는 인생과 우주의 본질을 추구하고 자신을 도덕적으로 완성시키는 것이었다. 그 뒤 훈구파의 몰락에 이어 사림파의 정계 진출이 활발하게 이루어지자 과거준비를 위한 교육도 동시에 강조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결국 서원에서의 유교교육은 일차적으로는 이른바 도학(道學)으로서의 유교공부였으며, 다음으로는 과거에 응시하는데 필요한 사장학적(詞章學的)인 내용도 교육의 대종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병산서원 서원의 또 한 가지 중요한 기능인 교화기능은 주로 선현에 대한 제사를 통하여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 제사의 대상인물에 있어서는 성균관이나 향교와는 차이가 있었다. 성균관과 향교의 문묘(文廟)에 배향된 인물은 공부자를 비롯하여 사성(四聖)과 십철(十哲), 및 송대의 6현 그리고 우리 나라 18현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서원은 사학이라는 특성상 대부분 문중에 의해 건립되었던 까닭에 자신의 문중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인물 가운데 뛰어난 인물을 배향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물론 수적인 면에서 볼 때에는 이황과 송시열(宋時烈), 이이 등의 인물을 배향한 서원이 가장 많았으나 배향인물의 선택 폭에 있어서는 국가에 의해 정해진 성균관과 향교에 비해 훨씬 넓었다. 초기에는 하나의 서원에서 가장 대표적인 인물 한 분을 선정하여 제사를 모셔왔으며, 그 이후에 또 다른 인물이 배출되면 제사 대상에 추가하곤 하였다. 그러나 후기로 접어들며 서원의 질서가 문란해지기 시작한 이후에는 그 제사대상 인물에 대한 선정이 뚜렷한 기준도 없이 이루어지거나 심지어는 세력과시를 위한 목적으로 한 서원에서 수많은 인물을 동시에 제사지내는 등의 폐단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화천서원의 향사 제사 이외에 서원이 지니고 있었던 교화기능으로는 지방 풍속의 규찰(糾察)기능을 들 수 있다. 이같은 기능은 향교에도 있어왔지만 그 성격이나 내용으로 볼 때 서원의 규찰기능이 보다 실질적이고 강력한 형태로 나타났다. 서원에서는 그 지역의 여론을 이끌어 나갔음은 물론, 각 지방별로 설치된 향약을 기준으로 효자나 열녀 등을 표창하고 강상윤리에 어긋나는 행동을 한 자를 성토하는 등의 직접적인 교화활동을 하였다. 즉, 각 고을에 설치된 국가의 관부(官府)가 주로 형사(刑事)문제를 처리하였다면 서원에서는 도덕적인 문제들을 평가하고 처리해 나갔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도 후기에 들어서게 되면 경우에 따라 무고한 백성에 대한 탄압수단으로 악용되는 폐단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