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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교의 역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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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혁 성균관과 더불어 우리 나라 전통 교육의 중추를 맡아 수많은 인재를 양성하고 배출한 곳이 바로 향교이다. 향교는 오늘날의 국립 중등 교육기관에 해당하는 곳으로 향학(鄕學) 으로도 불렸다. 향(鄕)은 수도를 제외한 행정구역을 일반적으로 지칭하는 말이고 교(校)는 학교를 의미하는 것으로 향교는 지방의 학교라고 정의할 수 있다.
우리 나라의 지방교육이 최초로 제도화되기 시작한 것은 중국으로부터 유교가 전래되고 난 이후의 일이며, 구체적으로 고구려가 평양으로 도읍을 옮긴 뒤 각 지역에 설립한 경당에서 비롯된다. 경당에서는 유교의 경전을 중심으로 한 교육이 이루어졌으며, 이와 함께 궁술(弓術)도 가르쳐 문무(文武)를 겸비한 교육을 하였다.
일제 강점기의 탄압
그러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양난(兩難)을 거치며 국가의 재정이 극히 피폐해졌으며, 여기에 정치적인 실정(失政)이 거듭됨으로써 국가 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이 점차 약화되어져 갔다. 이에 따라 조선왕조 후반기로 접어들며 기능이 약화된 향교를 보완하기 위하여 사립 교육기관인 서원(書院)이 각지에 설치되기 시작하였으며, 그 수는 전국에 걸쳐 400여개소에 달하였다. 16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전반에 걸쳐 대부분 설립된 서원은 부분적으로 향교의 기능을 보완하고 향촌(鄕村) 사회의 구심점이 되는 등 많은 역할을 하였으나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격화되기 시작한 당쟁(黨爭)과 연결되면서 여러 가지 부작용을 낳게 되었다. 이에 따라 조선 말기인 대원군(大院君)때에 이르러 마침내 서원 철폐의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다.
오늘날의 향교
해방에 뒤이은 국토의 분단, 그리고 다시 한차례 밀어닥친 6·25사변의 혼란과 시련 속에서도 유교의 조직과 체계를 다시금 재정비하기 위한 노력은 성균관과 각 지방의 향교를 중심으로 꾸준히 전개되었다. 이러한 노력의 결실로 현재 남한에 남아있는 234개의 향교는 이미 체제정비가 완료된 상태이며, 유교와 지역사회 교화의 본부로서의 본연의 역할을 수행해 나가고 있다. 특히 1980년대 들어오면서 향교의 역할은 더욱 두드러져 전국 각 향교에서 청소년을 대상으로 '청소년인성교육 현장교실' 및 각 학교를 대상으로 실시하는 '예절교육' 등을 개설하는 등 사회교화(社會敎化) 및 교육기관으로서의 본래의 기능과 모습을 점차 되찾아가고 있다.
향교의 기능
기록에 의하면 향교의 설치는 고려 태조(太祖) 13년(930년) 평양에 향교를 설치하여 6부생(六部生)을 가르치고 문묘를 세워 제사를 지내기 시작한 것이 그 직접적인 시초가 된다. 이어 성종(成宗) 6년(987년)에는 전국 12목(양주·광주·충주·청주·공주·진주·상주·전주·나주·승주·해주·황주)에 학교를 설치하고 경학박사(經學博士)를 배치하였으며, 주군(州郡)에 학사(學舍)를 세워 지방교육의 기틀을 다져나갔다. 이후 인종(仁宗) 5년(1127년)에는 각 주(州)에 학교를 세우고 교육을 진작시킬 것을 명하였으며, 충숙왕(忠肅王) 6년(1314년)에는 이곡(李穀)을 모든 주(州)에 파견하여 향교를 부흥케 하였다. 이에 따라 향교가 각 지방에 널리 설치되고 유교교육의 진작과 지방문화 향상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러나 향교의 본격적인 발달과 체제의 완비는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이루어진다. 이에 도움을 준 것은 무엇보다도 고려말에 수입되어 조선왕조의 창업이념으로 자리잡게 된 성리학(性理學)이었다. 고려시대에도 유교는 국가이념으로서의 위치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명실상부한 것은 아니었다. |